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브이 포 벤데타 영화 리뷰

by 축겜탐구 2021. 11. 5.

도사리는 거대한 음모

<매트릭스> 3부작의 감독 워쇼스키 자매가 제작하고 각색까지 맡은 <브이 포 벤데타>는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액션 영화라기보다는 정치 스릴러 같은 느낌을 준다.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근미래의 영국은 서틀러라는 이름의 독재자가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다. 피부색, 성적 취향, 정치적 성향이 다른 자들은 모두 어디론가 끌려가고, 살아남은 자들도 치밀한 감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브이'(휴고 위빙)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나타나 정부기관을 폭파하는 테러를 감행한다. 그리고 선언한다. 1년 후에는 국회의사당을 폭파하겠다고. 브이를 추적하던 경찰 수사관 핀치(스티브 레아)는 사건의 배후에 정부가 저지른 거대한 음모, 거대한 비리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낸다.

 

브이는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칼을 휘두르며 악당들을 물리친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가이 포크스는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이다. 1605년에 일어난 화약 음모 사건은 국회의사당을 폭파하여 제임스왕을 비롯한 정부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가톨릭을 복권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가이 포크스를 비롯한 주모자들은 처형되었고, 지금 영국에서는 매년 11월 5일이면 불꽃 축제와 함께 모닥불을 피우고 '가이'란 이름의 인형을 불태우는 행사가 열린다. <브이 포 벤데타>에서 브이가 의사당을 폭파하고 폭죽을 터트리는 것은,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셈이다. 자신의 신념을 위하여, 무언가를 부숴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혁명이다.

 

영국적인 색채가 짙다

원작자인 앨런 무어가 "체제의 파괴는 브이의 존재 이유"라고 말한 것처럼, 브이는 테러리스트다. 독재의 상징인 정부 건물을 폭파하고, 한편으론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암살을 자행한다. <맥베스>와 <헨리 5세> 등의 대사를 인용하면서 브이는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기꺼이 폭력과 죽음을 택한다.

 

그의 'V'는 개인적인 그리고 공적인 복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용서와 관용 그리고 평화가 아니라 분노와 증오 그리고 폭력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런 점에서 브이는 순교자다. 그리고 당대의 정치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의문부호가 가득한 9·11 사건을 기화로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미국은 얼굴 없는, 혹은 가면을 쓴 테러리스트와 싸우고 있다. 반대로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은 미국에게 죽은 가족과 친구를 위해, 즉 복수를 위해 피의 성전에 나서고 있다. 자신의 죽음과 신념을 맞바꾸며. 지나칠 정도로 영국적인 색채가 강한 <브이 포 벤데타>는 마치 미국의 '음모'를 그린 영화처럼 보인다.

 

심각한 이야기를 대중적인 오락상품 속에서 다루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만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서구의 그래픽노블은 이미 20여 년 전에 혁명의 과정을 거치면서,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예술' 지위를 확보했다.

 

80년대 중반 등장한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앨런 무어의 <왓치맨>은 일면적인 영웅의 모습에 과격한 묘사와 정치적, 철학적 발언을 집어넣어 만화를 '성인의 문학'으로 재탄생시켰다. 냉전에 대한 정치적인 비판, 선악을 가름할 수 없는 모순적인 영웅, 잔혹하면서도 매혹적인 스타일의 폭력 묘사 등등.

 

혁명을 통해 새롭게 부활한 서구의 그래픽노블은 치밀하게 리얼리티에 기반을 두고 있고, 교양 있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시각예술이 되었다. 영화에서 슈퍼히어로의 이야기가 많아진 이유는 단지 특수효과의 발전 때문만이 아니라 그래픽노블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조금은 지루한 영화

<브이 포 벤데타>를 보고 있으면,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80년대와 2000년대 미국이 자꾸만 떠오른다. 만화적일지라도 그럴듯한 설정으로 현실을 환기하는 효과는 분명하다. <브이 포 벤데타>는 분명 액션영화라기보다 정치 스릴러다. 하지만 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브이 포 벤데타>가 대단히 흥미진진한 영화라고 하기는 힘들다.

 

눈을 즐겁게 하는 액션은 조금 밖에 엇고, 주로 브이의 철학 강의와 경구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매트릭스 2: 리로디드>(2003)를 조금 더 지루하게, 조금 더 현학적으로 만들었다고나 할까. 그래픽노블이 아이보다는 어른에게 초점을 맞춘 것처럼, <브이 포 벤데타>는 대중문화 속에서 성장한 어른들을 위한 정치스릴러물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