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이유
영화를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대부분은 즐거움이나 재미를 느끼기 위한 것이 아닐까? 액션 영화를 보면서 함께 즐거워하고, 멜로 영화를 보면서 함께 슬퍼하거나 감동한다던가 하는. 우리가 흔히 보는 할리우드 영화들은 이런 기능을 중시한다. 흔히 할리우드를 '꿈의 공장'이라 부르는 것처럼, 영화를 보면서 현실의 고통이나 괴로움 같은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영화 산업이 최고로 호황이었던 시절은,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던 대공황 시절이었다. 그중 비현실적인 장르인 뮤지컬이 가장 인기를 누렸고.
현실을 잊고 꿈을 꾸게 하는 영화의 기능은 무척 중요하다. 나 역시 그런 경우가 많다. 세상사에 지치고 힘들었을 때 찾는 영화는 주로 액션, 코미디, 공포영화 같은 것들이다.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영화들. 하지만 단지 킬링 타임용의 영화들을 찾아보다가도, 때로 뭔가 의미를 던져주는 영화들을 만나게 된다. 이를테면 만화책을 각색한 <엑스맨>(2000) 같은 영화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액션 때문에 찾아보게 되지만, 보다 보면 뭔가 생각을 하게 된다. 왜 돌연변이들은 차별을 당하는 것일까. 그런 걸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현실의 차별을 떠올리게 된다. 인종차별이나 민족 차별, 심지어 지역 차별까지도.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아예 <엑스맨>의 첫 부분에 나치의 유태인 학살 장면을 집어넣어, 영화의 의미를 분명하게 부각시킨다. 우리 현실의 차별을 다시 한번 돌아보라는 것이다.
영화를 단지 즐거움이나 재미로 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영화를 어떤 교양이나 예술적 감흥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영화를 보면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거나, 그 영화가 만들어낸 어떤 영상 같은 것을 즐기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예술영화'라 불리는 영화들을 본다. 할리우드의 오락영화가 현실을 잊고 꿈을 꾸게 해주는 것과는 달리, 많은 예술영화는 관객이 현실을 바라보게 만든다. 영화를 통해 현실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락으로서의 영화와 예술로서의 영화. 그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마 모든 것이 다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오락영화를 만들어도, 그것이 어떤 경지에 오르면 그 자체로 예술이 된다. 이를테면 <다이 하드>(1988)나 <터미네이터>(1984)처럼.
경계에 있는 매트릭스 시리즈
<매트릭스3 레볼루션>도 그런 경계에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2, 3편은 비판도 많았지만, 1999년에 나온 <매트릭스>는 누구나 찬사를 보냈다. 단지 영화에 대한 열광만이 아니었다. <매트릭스>의 설정과 내용을 바탕으로 철학의 개념과 의미 등을 설명한 철학책이 몇 권이나 등장했고, <매트릭스>는 21세기의 영화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보여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매트릭스>를 보러 간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을 기대하고 간 것은 아니었다. <매트릭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 영화가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감독인 워쇼스키 자매는 <바운드>(1996)라는 소규모 영화를 한 번 연출한 신예였고, 키아누 리브스는 <스피드>(1994)로 인기를 누리기는 했지만 후속작의 부진으로 몰락하던 중이었다. 가상현실을 다룬 SF도 별로 신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매트릭스>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몇 가지만 들어보자. <매트릭스>는 액션의 진화를 보여주었다 홍콩영화와 일본 애니메이션의 팬이었던 워쇼스키 자매는 <취권>(1978)의 감독이었던 원화평을 무술감독으로 기용하며, 새로운 액션 장면을 연출했다. 거기에 가미된 것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스타일이었다. <매트릭스>의 서두에서 트리니티(캐리앤 모스)가 보여주는 많은 액션 장면은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대부분의 관객은 <매트릭스>에서 이전에는 만나지 못한 새로운 영상을 만났다. 거기에 설정 또한 놀라웠다. 주인공인 해커 앤더슨(키아누 리브스)은 어느 날 선택에 기로에 섰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만 허구인 가상의 현실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것인가, 남루하고 초라하지만 모든 것이 진짜인 현실에서 싸울 것인가. <매트릭스>의 설정은 <터미네이터>에서 몇 세기를 더 나아간다. 기계는 이미 인간을 정복했고,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쓰고 있다. 인간을 배양하면서, 그들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종의 가상공간인 '매트릭스'를 만든 것이다. 인간은 매트릭스에서 실제로 살아간다고 느낀다. 그리고 에너지를 발산하면 그것이 기계의 에너지원으로 바뀌는 것이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철학적 의미
3부작인 <매트릭스>가 일러주는 첫 번째 철학적 의미는,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배부른 돼지가 될 것인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것인가. 현실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그냥 편하게 살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사이퍼는 배신을 한다. 앤더슨은 안온한 현실을 버리고, 구원자가 된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한 구원자인지 아직 믿지 못한다. 2, 3편을 거듭하면서 <매트릭스>는 말이 많아진다. <매트릭스>의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갖가지 철학적인 의미를 붙여댄 것이다. 워쇼스키 자매는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에게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읽으라고 했다. 자신의 영화가 그의 철학적 기초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원본과 복제, 현실과 사상 현실 등의 의미가 <매트릭스>에서는 끊임없이 보인다. 그러다가 3편인 <매트릭스3 레볼루션>에서는 결국 인간의 선택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영원한 결말은 존재하지 않지만, 현실을 찾으려는 인간의 선택과 의지가 핵심이라는 것.
<매트릭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읽을 필요는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영화를 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매트릭스>를 보면서, 여러 가지 철학적 개념을 떠올릴 수도 있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을 되짚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반대로 그냥 <매트릭스>의 액션 자체에만 취해서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엇는 것이다. 보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그런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매트릭스>가 말해준 것 역시 그것이다. <매트릭스>는 오락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에 선 영화다. 오락과 예술에서 영원한 승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서로 보완해주는 관계가 아닐까. 즐기는 것도 필요하고,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매트릭스>는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도 볼만한 영화다.
댓글